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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6월 10일 (목) 15:18 [제 840 호]
골목 깊숙히 숨은 문화재, 제대로된 관리 시급

유형문화재 41호 화산군 이연 신도비, 문화재 맞아?
양호거사비도 무관심속 명지대 학생회관 뒷동산에
주변에 의료수거함, 공중전화박스, 적치물까지 대책 필요

△조선후기 석비의 형태를 띠고 있는 화산군 이연 신도비 보호책 자물쇠가 비닐로 쌓여진채 잠겨 있다. 거북골이라는 이름을 지키기 위해 행사를 만드는 등 노력을 해왔다는 서대문문화원 조일봉 감사가 신도비에 대한 안타까움을 전했다.
△신도비 앞은 의류수거함과 공중전화 부스까지 있어 문화재임을 알수 있는 것은 최근 교체한 안내판과 낡은 경고문 뿐이다.
△명지대학교 학생회관 뒷 동산에 위치한 유형문화재 양호거사비
△거북비로 인해 마을이름이 거북골로 불리고 있는 도로명 표지판이다.

시도유형문화재 41호인 화산군 이연 신도비와 91호인 양호거사비가 관리는커녕 무관심 속에 잊혀지고 있어 관리를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

두 문화재는 각각 북가좌동과 남가좌동에 위치해 있으나 화산군 신도비는 골목길 교회 앞에 덩그라니  남아 있는 신도비를 보호하기 위한 철재 보호대는 자물쇠는 검정 비닐로 꽁꽁 쌓여 있어 미간을 찌푸리게 한다. 그나마 문화재임을 알수 있는 것은 앞에 선 문화재 알림판이다. 옆에 서 있는 경고문 조차 빛바랜 모습이다.
명지대학교 학생회관 뒷동산 기슭에 방치된 양호거사비 역시 문화재라고는 볼 수 없는 모습으로 남아 있다.

속칭 거북바위로 통하는 화산군 이연신도비는 화산군(花山君) 이연(1647~1702)의 행적을 기록한 신도비다. 화산군은 선조의 일곱째 아들인 인성군(仁城君)의 손자로 1661년(현종 2)에 화산군에 봉해졌고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냈다. 세상을 떠난 후 1726년(영조 2)에 오위도총부 도총관으로 증직된 뒤 1746년(영조 22)에 효간(孝簡)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이 비는 화산군에 대한 증직과 시호가 내려진 이후인 1747년(영조 23)에 이연의 아들인 낙창군이 아버지의 행적을 밝히기 위해 세웠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비문을 지었고, 화산군의 조카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가 글씨를 썼으며, 낙창군이 전액(篆額)을 썼다. 이 비는 옥개석(屋蓋石)·비신(碑身)·귀부(龜趺)를 갖추었는데 조선 후기에 나타난 다양한 형식의 석비 중하나다. 비의 옥개석은 팔작지붕 형태인데 용마루에 두 마리의 이무기가 양 끝을 바라보고 있고, 팔작지붕의 처마 끝마다 각각 이무기의 얼굴을 양각했다.

비의 받침인 귀부의 몸은 거북이고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 모양으로 만든 것이 눈에 띈다. 현재 화산군의 묘소는 경기도 선산(先山)으로 옮겨져 이곳에는 신도비와 문인석 1기만 남아 있다.
그 후 신도비 부근에는 교회가 들어서고 곳곳이 개발되면서 문화재 안내판만이 그 존재를 알 수 있을 뿐 주변 관리가 전혀되지 못하고 있다.

신도비 앞에는 의류수거함과 소방서가 설치한 소화기, 공중전화 부스까지 앞을 막고 있다.
북가좌동에서 통장을 맡아왔던 서대문문화원 조일봉 감사는 『북가좌동 일대가 거북골로가 된 것은 모두 거북비로 불리던 화산군 신도비에서 유래된 것』이라면서 『그럼에도 문화재가 제대로 관리되지 못해자물쇠가 비닐로 쌓여있고, 많은 주민들이 신도비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있다』면서 안타까움을 전했다.

조일봉 감사는 이어 『이전에는 동에서 거북비를 기리기 위해  거북 모양을 만들어 참가하는 등 노력을 했지만, 개발이 진행 되면서 예전 어르신들은 돌아가시고, 주민들이 바뀌면서 그 의미조차 퇴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명지대학교 학생회관 뒷동산에 자리하고 있는 양호거사비 역시 문화재라기 보다 뒷산 비석 정도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지원하기 위해 들어왔던 명나라 장군 양호(楊鎬)의 공을 기리는 이 비는 연꽃이 조각되어 있는 사각받침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을 하고있다.
머릿돌 앞면에는 구름 위에 앉아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마리의 용을 새겼다. 양호(楊鎬)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워 놓은 비는 모두 4기로, 선조 31년(1598)·광해군 2년(1610)·영조 40년(1764)·헌종 1년(1835)에 각각 세웠다고 전해진다. 그 중 헌종 때 만들어진 것은 서울 대신고등학교에서 발견됐고, 명지대에 남은 비는 선조∼영조 때 만들어진 3기 중 하나로 추측될 뿐이다. 비의 정확한 연대와 나머지 2기의 행방은 아직 연구 중에 있어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지금처럼 방치된다면 먼 미래에 나머지 2기처럼 사라지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문화재 관리를 맡고 있는 서대문구청 문화체육과는 담당주무관 1명이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및 전통사찰까지 모든 문화재를 관리하고 있어 유형문화재관리까지 맡기는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
서대문구청 관계자는 『정기적으로 문화재 점검을 실시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문화재의 관리주체는 소유자 원칙으로 양호거사비의 경우는 관리단체가 명지대학교 법인으로 돼 있다. 옮기거나 할 수는 없으므로 문화재에 영향이 없도록  신경을 쓰겠다』고 전했다. 또 『신도비의 자물쇠는 녹슬것을 대비해 비닐로 쌓아둔 것이며, 훼손된 경고문은 다시 정비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문화재는 과거 역사에 대한 소중한 기록이다. 그런 이유로 서울시가 문화재 지정을 통해 관리와 보호를 권고하고 있지만, 도심속 유형문화재들은 점차 개발논리에 밀려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있다.
서대문구에서도 이에 대한 자치구 나름의 조례 제정 등 대책마련이 시급한 시점이다. 문화재 관리주체는 법인이나 토지 소유주라 하더라도 관리나 보호 주체를 일원화하는 등 세부적인 규칙마련도 필요하다.

「역사를 모르는 사람은 잘못을 반복하기 마련」이라고 했다. 문화재의 의미는 역사를 알고, 지혜로운 미래를 만들어 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옥현영 기자>

ⓒ sdmnews 옥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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